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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정선정, 오픈갤러리 학예팀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일제 식민통치 직전 대한제국 시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가베’, ‘모던보이’, ‘활빈당’ 등 시대상을 반영하는 생소한 단어들이 등장하며 연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등 1900년대 개화기의 조선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직전의 조선은 미국, 일본 등 다양한 국가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시기입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겪고,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는, 친일 논쟁, 독도 논쟁, 위안부 보상 등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언제나 뜨거운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한국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으며 우리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한국 미술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대한 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많은 작품들은 당시에도 ‘조선의 색’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우리의 것’을 확립한 시기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의 미술관에서는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등 일제강점기 당시에 빛을 보지 못했던 조선 예술가들의 걸작을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내는 전시들이 지속적으로 기획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당시를 대표하는 화가들과 미술 작품을 살펴보고, 그 작품들이 과연 진정한 ‘우리의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진단해보고자 합니다.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
‘선전’으로 약칭되는 조선미술전람회는 1930년대에 많은 미술가들을 배출하고 성장하였던 미술작품 공모전입니다.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던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인성이 있습니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 후, 1929년의 8회 조선미전에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19세가 되던 해 ‘선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일본의 요미우리(読売新聞, よみうりしんぶん) 신문에 ‘천재소년 이인성’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의 입선, 총독상 그리고 창덕궁상과 같은 최고의 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귀재’라는 찬사를 받으며, 그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먼저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인성, <가을 어느날> 캔버스에 유채, 1934 (이미지 출처 : 호암미술관)
바구니를 팔에 걸쳐든 반나체의 여인과 그녀의 아들로 보이는 어린이가 시골 들판에 서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푸르고 붉게 표현하였고, 오염되지 않은 풍경의 모습을 강렬하고 토속적인 원색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이 그림은 현실과 상상을 조합하여 재구성한 조선의 가을 풍경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작품의 제목이 <가을 어느날>인 점을 고려했을 때, 그림 속 여인과 어린이는 반나체의 모습으로 다소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가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더운 열대지방의 풍경을 묘사한 느낌입니다. 종합해 볼 때 이인성은 아마 실제 조선의 가을 풍경을 그렸다기보다는 상상 속 풍경을 작품으로 구현하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계절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적 상황과도 다소 동떨어진 부분이 많은데요. 이 부분은 동시대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소개된 다른 화가들의 출품작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좌) 김인승, <화실>, 1937, 캔버스에 유채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기사)
(우) 나혜석, <자화상>, 1928, 캔버스에 유채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인성과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김인승과 나혜석 화가의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왼쪽 그림은 김인승에 의해 그려진 <화실>의 모습이며, 오른쪽 그림은 여성 화가였던 나혜석의 <자화상>입니다. 이 두 작품은 식민지 조선의 모습이나 이인성이 묘사한 한국의 30년대와는 전혀 다른, 유복한 근대 상류계급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실>을 그린 김인승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한국 서양화 1세대 화가로 구상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하며 한국 아카데미즘 미술의 전통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 <화실>은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입선작으로, 스케치하는 남자와 옆에 나란히 앉아 쳐다보는 신여성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작품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자는 김인승 자신입니다. 한편 나혜석은 여성들의 자유와 권위가 낮았던 당시의 선구적 여성으로 예술 활동을 펼치던 인물로, ‘신여성’ 혹은 ‘모던 걸’로 불렸으며 화가로서의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화가입니다. <자화상>은 어두운 배경에 짙은 색의 옷으로 채색되었으며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묘사된 여성의 모습은 작품의 쓸쓸한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선명한 윤곽선으로 표현된 이목구비는 서구적인 외모를 띄고 있으며, 표현주의적인 기법이 구사되었습니다.

이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옷차림을 살펴보면, 1930년대 조선의 모습은 서양의 양장을 입고 다닐 만큼 꽤나 근대화된 시기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시대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혔던 이인성의 풍경화가 조선의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비슷한 시대에 전람회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반되는 조선의 모습이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선 향토색 : 당시 작가들의 노력과 그에 대한 평가
1930년대의 한국 미술은 서구적 근대에서 동양적 근대로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소재나 형식적인 차원에서 ‘조선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습니다. 향토적 소재는 일본의 패권주의 안에서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화가들은 단체를 만들고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우리만의 고유성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도 끝에 1930년대 조선 미술계에서는 ‘향토색’이 주요 쟁점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향토색’이란 ‘향토성’이란 말과 함께 쓰이며, 조선의 시골 풍경이나 생활 풍습을 다뤄 ‘조선적인 것’을 강조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전람회를 통해 민족적 정취나 한국적인 풍토 및 풍물을 상징하는 소재를 다룬 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이 중에는 시골 풍경을 주된 소재로 삼아 향토성을 나타낸 작품에는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 장우성의 <귀목>, 이영일의 <시골소녀> 그리고 오지호의 <남향집>이 있었는데요. 이들은 시골과 고향의 풍물을 다루는 것이 문화예술적 유산과 전통에서 민족 고유의 특성을 찾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위) 장우성, <귀목>, 비단에 수묵담채, 1935
(아래 좌) 이영일, <시골소녀>, 비단에 채색, 1928
(아래위) 오지호, <남향집>, 캔버스에 유채, 1939
(이미지 출처 : 모두 네이버 공연 전시 포스트)
일제강점기 시대에 화가 겸 비평가로서 활동하였던 심영섭의 <아세아주의 미술론>에 따르면, ‘향토색’에 대한 논의는 이미 1920년대 말부터 일본과 조선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향토독본>을 발행하는 등 학교 교육에서 직접적으로 도시화 되어가는 농촌을 보호하며 조선 영토 전체를 향토화하려는 교육을 실행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의 교육과 식민정책에 영향을 받았으며, 자연스럽게 향토색이 조선의 민족성이라는 인식과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특징이 조선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주입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달리, 당시 일본 미술계는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후기 인상주의까지 발전하는 등의 행보를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을 평가하고 수상권을 결정지었던 심사위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습니다. 일본 심사위원들은 조선 화가들이 목가적이고 원시적인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 높은 점수를 주었으며, 그러한 향토적 소재가 조선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라며 적극 권장하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김인승 또는 나혜석의 작품들처럼 조선의 근대적 모습을 담은 경우에는 크게 찬사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이 문화적으로 매우 근대화되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화가들에게는 다소 원시적인 소재에 착안하도록 강요한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심사위원들의 평가 기준이 다소 모순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조선 화가들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전람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목표로 일본인들이 설정한 틀에 세뇌 당한 것은 아니냐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향토성을 띠는 목가적인 풍경화는 일본 작품들의 근대적인 모습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조선을 더 미개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시각을 제시하였습니다. 반면 향토색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는데요. 향토색에 대한 표현은 화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으며, 소재와 주제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가 당시 화가들의 기법이나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그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당시 화가들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일본 심사위원의 취향에 부응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향토적인 색상, 토속적인 풍경, 인물 등의 소재 자체에서 조선의 주체성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우리만의 정서와 정체성을 찾으려는 데에는 분명 당시 예술가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화가들이 일본으로부터 탈피하여 조선 미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는 의도는 의미 있게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향토색 표현 뒤에 숨겨진 일본 심사위원들의 욕망
1920년대 초부터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던 모더니즘 미술은, 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화가들에게도 수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반 고흐, 고갱, 세잔 등 후기 인상파를 비롯해 주관적이면서도 자연주의적 형상성을 존중하는 모더니즘은 특히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유통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본에서 유학을 했던 화가들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화풍을 그대로 흡수하여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동향을 대표한 작가가 이인성입니다. 이인성은 유학 이후인 1933년부터 유화와 수채화를 다루며 기법적인 부분에서 세잔과 고갱의 영향을 받은 후기 인상파의 화풍을 반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 과 <경주의 산곡에서> 등은 폴 고갱의 강렬한 색채와 기법 등을 연상케합니다.
(좌) Paul Gauguin, <When will you marry?>1892, oil on canvas
(우) Paul Gauguin, <Where are you going?>, 1893, oil on canvas
(이미지 출처 : 모두 Wikipedia)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935 / 삼성리움미술관 소장 (이미지 출처: 뮤움)
이인성과 고갱의 작품은 기법뿐 아니라 풍경이나 인물의 표현에도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두 화가 모두 인물을 반나체와 맨발의 모습으로 묘사했으며 색감 또한 어두운 갈색으로 채색하였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목가적이며 원시적인 농촌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인성과 고갱은 시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닮은 점이 많다는 점입니다. 고갱은 프랑스 화가이지만 타히티 섬에 오랜 기간 동안 체류하며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타히티는 1844년 프랑스에 의해 왕조가 멸망되어 식민지로 통치된 섬이었습니다. 고갱은 프랑스의 문명세계에서 벗어나 타히티의 순수함, 원시성을 전달하고자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갱의 그림에 열광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의 원시적인 모습을 그린 고갱의 작품에 프랑스인들이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들은 타히티인들을 자신들과 다른 인종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고갱의 작품을 통해 그 이미지를 확립했던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갱의 작품에 대해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만이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 <When will you marry?>는 강렬한 색상과 단순한 형태를 제안하며 후기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작품으로, 2015년 3000억 원대에 판매되며 당시의 세계 최고가 경매 기록을 경신하였습니다.

한편 향토성을 대표하는 이인성 화가의 작품은 고갱의 작품과 나란히 보았을 때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기법적으로 뛰어난 부분이 많습니다. 소재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조선인들을 실상과는 다소 달랐더라도, 한국의 근대 미술에 있어 서양의 후기 인상주의를 수용하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우)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들 (이미지 출처 : 모두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비평가들에 따라 향토성에 대한 평가에는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향토성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향토적 소재에 대한 평가는 우리 정체성의 확립이었다는 긍정적인 의견과 일본인의 욕망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적인 의견으로 나뉩니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조선의 정체성과 대중의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조선의 색깔과 정체성을 뚜렷하게 표출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비판적인 평가로는 향토성을 통해 정체성을 찾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연민의 감정을 자아내는 내용과 소재를 다루며 우리의 ‘무기력한 상황, 자포자기의 암울한 민족의 정서를 돋보이게 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향토성에 대한 발굴은 식민지 조선의 처절한 현실을 부각 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인성을 포함한 1930년대의 작품들은 당시의 한국을 보여주는 사료로서 앞으로도 많은 미술관에서 소개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생애나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방향으로 접근한다면 더욱 다양한 해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그림을 감상하며 향토색을 찾기 위한 당시 화가들의 노력 안에 담긴 애환의 감정에 대해 떠올려본다면, 감성을 자극하는 애잔한 감동으로 심금이 울릴 것입니다.
용어해설
조선미술전람회: 1922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작품 공모전. 약칭으로 선전(鮮展)이라 부른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거듭하였다.
참고문헌
1. 김용준 <제9회 미전과 조선화단> 중외일보 (1930.5.18)
2. 두산백과 김인승
3. 박계리, 「 일제시대 ‘조선 향토색’」, p.202
4. 변종필, 「현실을 초월한 이상세계를 찾아서」, 문화칼럼, 2016.04.29
5. 정형민, ‘근현대 한국미술과 ‘동양’ 개념’, 2012
6. 홍선표, ‘한국 근대미술사’, 2009, p.199-221